“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詩는 우리가 알기로는 양사언이 모든 일에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교훈 조 詩로만 알고 있었는데, 깊은 내력을 살펴보니 처절하게 살다간 어머니를 그리는 詩라는 해석이 KBS 역사 이야기에서 밝혀졌다.

우리 선조들로부터 현세에 이르기 까지 위대한 인물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그들 어머니의 은공이 뒤에 숨어 있고, 이러한 모성애의 은공으로 훌륭한 인물은 더욱 훌륭한 인물로 재탄생 될 수 있었다.

우리들도 익히 알고 있는 율곡과 신사임당, 만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것이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대표적 한민족의 어머니이리라.
그러나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 민’이 전라도 영광의 사또로 부임해 내려가는 꽃 피는 삼월의 어느 날 어느 촌 고을을 지날 즈음, 농번기라 사람들이 집에 없었다.
이 집 저 집 둘러보는 중에 어느 한 집에서 한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뢴다.

그리고는 신관 사또가 거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냐고 하며 안으로 모시고 부지런히 진지를 지어 올린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 바른지 사또는 너무나 기특하게 여긴다.

아침을 잘 얻어먹은 젊은 신관 사또 ‘양 민’은 고마움에 보답을 하게 되는데…
신관 사또 ‘양 민’은 소매에서 부채 靑扇(청선)과 紅扇(홍선) 두 자루를 꺼내 소녀에게 준다.
그냥 전달하기는 멋쩍어 농담을 섞어 “이는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으라.”

‘채단’이라 함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녀는 안방으로 뛰어가 장롱을 뒤져 급히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靑扇(청선), 紅扇(홍선)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어리둥절한 사또는 왜 그러냐고 묻는다.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홍보 위에 놓여졌고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세월이 흘렀다.
사또 ‘양 민’이 이런 저런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노인이 사또를 뵙자고 찾아 왔다.
“몇 년 전 부임할 때 시골집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靑扇(청선), 紅扇(홍선) 두 자루를 주고 간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이제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한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 이후로 시집을 보내려 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 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또의 머리속엔 어떤 느낌이 스쳐 지나갔는지 모두 느끼리라.

“그 정성이 지극하거늘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날짜를 잡아 아내로 맞겠소”
식사 한 끼 얻어먹고 대가로 부채 두 자루 선물했으면 밥값으로 충분할 텐데, 졸지에 아내로까지 맞이하게 되었으니 운명의 장난인가,

신의 축복인가!
어디 삼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이다.
이 소녀가 바로 후에 양사언(楊士彦)의 어머니가 된다.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또는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 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士彦(사언)과 사기 두 아들이 탄생한다.
사준, 사언, 사기, 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풍채도 좋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정실부인이 죽고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게 되고,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뭐하나, 서자들인데.
이 소실부인의 서러움과 한탄은 적자가 아닌 서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실 부인의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양 민’이 죽고 장례 날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재주 있고 총명하며 풍채도 있거늘 첩이 낳았다 하여 나라 풍습은 그들에게서 서자의 너울을 벗겨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장손인 적자 양사준에게 울면서 부탁한다.

“첩이 또한 이 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지고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 께서는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으실 터이니, 이리 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이 모르게 될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하오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만다.
아들들이 그녀를 부둥켜 안았을 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아들을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던 여인,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던 선구자적인 신여성!
이 어머니의 죽음은 양사언이 더욱 훌륭한 문인이 되는 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양사언(楊士彦)은 후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고, 만호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다. 

<글 보내주신 분 : 박종현/Amkor Technology Korea(株) 常務理事 역임 亞親會 顧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