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초시가 오대인 잔칫집에 갔다가 어둑어둑 해질녘에 외솔고개를 넘고 있었다.
원래 왕래하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문데
땅거미까지 지니 적막강산에 바람소리 새소리뿐이다.

그때 “사람 살려.”
여인의 자지러진 비명이 솔밭에서 찢어졌다.
임 초시가 걸음을 멈추고 비명이 난 곳으로 숲을 헤치고 접근해보니 젊은이 둘이 한 여인을 잡고 있었다.

임 초시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여인은 나이를 제법 먹어 사십 줄에 접어든 듯한데 젊은 두 녀석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달려든 것이다.

‘야 이놈들’ 하고 고함 한 마디만 지르면 젊은 놈들은 도망칠 텐데 임 초시 입에서 고함은 안 나오고 침만 질질 흘러 수염을 탸고 내렸다.

속치마도 벗겨 내려진 여인이 발버둥을 쳤다.
고쟁이를 벗겨 내리자 입이 틀어막힌 여인은
욱욱 소리밖에 못 내며 사지를 뒤틀었다.

희멀건 엉덩이가 드러나자 한 녀석이 철썩철썩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치며
“나는 鼓手여.
방맹이 장단에 맞추어 한 곡조 뽑아 보드라고.”
그들은 킬킬 웃었다.

목을 빼서 자세히 보니 그 여인은 잔칫집에서 창을 뽑던 소리꾼이었다.
임 초시는 살금살금 자리를 옮겼다.
너덧 걸음을 옮긴 자리에서 보니 소리꾼 여인의 나신이 그대로 보였다.

임 초시 가슴 속은 갈등으로 뒤엉켰다.
소리꾼 여인을 살려줘야 하느냐
이 좋은 볼거리를 계속 구경해야 하느냐?
한 녀석이 그녀의 가랑이를 벌리고 시커먼 양물을 꺼냈다.

임 초시의 숨이 가빠졌다.
소리꾼 여인 배 위에서 용틀임을 하던 녀석이 부들부들 털며 쓰러지고 나자
다른 녀석이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여인의 배 위로 기어 올라갔다.

임 초시도 나무를 잡고 부르르 떨었다.
두 녀석이 일을 치른 후 바람처럼 사라지고 나자
소리꾼 여인은 한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워 있더니 상체를 일으켜 얼굴을 두 무릎에 묻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천천히 옷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만지며 숲을 빠져나갔다.

‘저 여자가 겁탈을 당하고 목을 매려 했다면 내가 한 목숨 살려냈을 거여.’
임 초시는 그렇게 자기 양심을 달래며 고개 너머 집으로 갔다.
임 초시는 반듯한 양반이다.

비록 급제는 못하고 초시에 그쳤지만 학식이 높아 사또가 관찰사에게 서찰을 올릴 때도 임 초시를 찾고 단오날 시조대회도 심사위원장은 으레 임 초시다.

천만석 부자는 아니지만 재산도 탄탄해 집안에 하인·하녀가 우글거린다.
임초시는 입이 무겁고 행동거지도 반듯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날 이때껏 살아오면서 남을 해코지한 적이 단 한번도 없고, 남으로부터 당해본 적도 없다.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뭔가 아쉬운 구석이 있다.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코피를 흘리며 주먹다짐을 해도 뜯어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한참 구경만 하다가 제 갈길을 가버린다.

화창한 봄날 임 초시가 전대를 차고 장터에 가려고 집을 나서자 부인을 따라 늦게 본 아홉살 삼대독자 아들이 대문 밖까지 나와
“아버님 잘 다녀오십시오.”
인사를 했다.

옥색 비단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임초시는 장터로 향했다.
장날, 장터에 가는 것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가슴이 설렌다.
족제비꼬리 붓과 만이천 봉 먹을 산 뒤 그는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장터에서 동네 사람을 여럿 만났지만 함께 먹자 소리 하지 않고, 제 돈 내고 제 혼자 먹고 술도 제 혼자 마셨다.
임 초시는 불콰하게 취해서 국밥집을 나와 갖바치 집으로 향했다.

아들 가죽신발을 비싼 돈을 주고 하나 샀다.
아들 녀석이 이번에 서당에서 또래 중에 가장 먼저 동몽선습을 뗐다.
방물가게에 들러 부인에게 줄 박가분과 동백기름도 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지라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높새바람이 심상찮게 불더니 그렇게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먹구름이 덮이고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온 천지는 칠흑이 되었고 바람은 사람을 날려보낼 듯이 몰아치고 장맛비처럼 비가 퍼부었다.
비에 흠뻑 젖어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와들거렸다.

마침내 저수지 뚝방길이 나왔다.
집에 거의 다 왔다.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져 저수지 속으로 빠져 물귀신이 될세라 조심조심 걷는데,
세찬 비바람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 사~람 살려, 어푸어푸….”
발길을 멈췄다.
저수지에 빠진 누군가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장터에서 술을 잔뜩 마신 영감탱이가 빠졌겠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들어가면 둘 다 죽는 법!

그는 서둘러 집으로 갔다.
뚝방길을 건너 백걸음도 못 미쳐 임 초시 집이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왜 혼자 오세요? 당신 맞으러 도롱이를 가지고 나간 우리 열이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