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구 黃狗]

옥색 한산 세모시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허우대 멀쑥한 젊은이가 강둑을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름드리 버드나무 그늘에 남정네들 여러 명이 모여 가마솥을 걸었다.

한 무리가 땔나무를 모아 오고 나머지는 밧줄을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 달고 줄을 잡아당기는데
밧줄 끝이 황구(黃狗) 목에 걸렸다.
황구는 마지막 목숨을 부지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가지에 걸린 밧줄을 두 남정네가 힘껏 잡아당기자 황구는 낑낑 캑캑 질질 끌려가다가 마침내 죽음이 코앞에 닥쳤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저항도 포기한 채 슬픈 눈으로 강둑 위의 선비를 쳐다보는 것이다.
여보시오~
선비가 소리치며 버드나무 밑으로 내려갔다.

그 개를 살려주시오.
내가 넉넉하게 값을 치르리다.
남정네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선비를 쳐다봤다.
선비가 허리춤에 찬 전대를 풀어 삼십냥을 꺼내
개목줄을 끌던 남정네의 손바닥 위에 놓았다.

남정네는 눈을 크게 떴다.
삼십냥이면 거의 황구 세마리 값이다.
황구는 눈물을 흘리듯 축축한 눈망울로 선비를 쳐다봤다.

선비는 황구를 몰고 가다가 개목줄을 풀어줬다.
황구는 도망은커녕 선비의 도포 자락에 붙어서 선비와 보조를 맞추었다.
얼마나 걸었나 나루터에 닿았을 땐
기나긴 오뉴월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으스름이 내려 앉았다.

선비는 나루터 주막으로 들어갔다.
나으리 어서 옵쇼.
주모가 반갑게 맞았다.
선비는 두루마기를 객방에 걸어두고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안마당 평상 위에 나와 앉았다.

주모 황구 먹을 것도 좀 챙겨 주시오 하자 주모는 생선 대가리와 잔반이 있으니 걱정 마시오
하면서 평상 아래 앉은 황구를 자세히 본다.

사냥개도 아니고 족보 있는 놈도 아닌데 어인 일로 선비님과 어울리지 않게 저런 똥개를 끌고 다니십니까요?
선비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구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우람한 덩치의 남자가 나와 짚신을 동여매며 부엌의 주모를 보고
내 다녀오리다. 발인을 보고 올테니 집 잘 보시오
하자 주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대문 밖까지 나갔다 돌아왔다.

선비는 초롱불 아래 평상에 앉아 국밥을 먹고 황구는 평상 아래서 개죽을 먹었다.
그 사이 안방에서 나온 주모는 머리에 동백기름을 얼굴엔 박가분을 하얗게 바르고 자주색 저고리로 바꿔 입고 나와 색기 흐르는 미소를 띄웠다.

선비 나으리 우리집 청주 한잔 들어보시지요.
이번 술은 잘 빚어 졌습니다요.
선비도 이런 분위기를 내팽개칠 위인이 아니다.
배 진사 그는 여덟번째 과거에 낙방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그 많은 문전옥답을 다 날리고 이제는 노름판에 기웃 대거나 과부들이나 후리는 파락호가 됐다.

전날 밤에는 모처럼 끗발이 밤새도록 이어져 전대가 두둑하던 차에
버드나무 아래 황구의 슬픈 눈빛과 마주친 것이다.

꼬리를 흔드는 주모를 자세히 보아하니 삼십대 중반 얼굴은 밉지 않고 허리끈을 바짝 동여매어 쪼개진 수밀도 엉덩이가 터질 듯했다.

배 진사가 묻지도 않는데 주모는
바깥양반은 당숙이 하직해 삼십리 떨어진 상가에 갔다가 닷새 후에 돌아올 겁니다요.

청주 한 호리병을 주모와 나눠 마시고 객방으로 들어가자
주모도 따라 들어 오더니 후- 호롱불을 껐다.
서로 열이 올라 옷을 벗는데 끼깅낑낑 황구가 쪽마루에 올라와 두 발로 문풍지를 뜯으며 컹컹 짖어대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배 진사가 저고리를 걸치고
뛰쳐나가 몽둥이를 들자 황구는 도망을 쳤다.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또다시 문을 뜯는 황구.
도망치는 녀석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한참 만에 발걸음을 돌려 주막집 안으로 들어오다가 배 진사는 깜짝 놀랐다.

문상 갔다던 바깥양반이 돌아와 발가벗은 주모를
마당에 끌어내놓고 매타작을 하는 것이다.
덩치가 산만한 바깥양반이 배 진사를 보더니
선비 나으리 음탕한 이년의 유혹을 뿌리치시고… 훌륭하십니다
머리를 조아렸다.

황구가 배 진사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황구가 배 진사의 두루마기 자락을 물고 당기는 걸 뿌리치고 노름판에 들어가면 영락없이 몽땅 털리고 황구가 꼬리 치는 걸 보고 들어가면 그날 밤은 끗발이 서 판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배 진사와 황구는 언제나 붙어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