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노천명(1912~1957)

앞벌 논가에서 개구리들이 소낙비 소리처럼 울어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 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범상넝쿨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로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의 값진 여름밤의 운치가 있다.

달 아래 호박꽃이 화안한 저녁이면 군색스럽지 않아도 좋은 넓은 마당에는 이 모깃불이 피워지고 그 옆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여기선 여름살이 다림질(다리미질)이 한창 벌어진다.

멍석자리에 이렇게 앉아 보면 시누이와 올케도 정다울 수 있고 큰애기에게 다림질을 붙잡히며 지긋한 나이를 한 어머니는 별처럼 머언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함지박에는 갓(이제 막)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오란 강냉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오는 법이겠다.

쑥댓불의 알싸한 내를 싫찮게 맡으며 불부채(불을 부치는 부채)로 종아리에 덤비는 모기를 날리면서 강냉이를 뜯어먹고 누웠으면 여인네들의 이야기 꽃이 핀다.

이런 저녁 멍석으로 나오는 별식은 강냉이뿐이 아니다. 연자간에서 가주(갓) 빻아 온 햇밀에다 굵직굵직하고 얼숭덜숭한 강낭콩을 두고 한 밀범벅이 또 있겠다. 그 구수한 맛은 이런 대처(大處, 도회지)의 식당음식쯤 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온 집안에 매캐한 연기가 골고루 퍼질 때쯤 되면 쑥 냄새는 한층 짙어져서 가정(집 안)으로 들어간다. 영악스럽던 모기들도 아리숭 아리숭(어릿어릿) 하는가 하면 수풀 기슭으로 반딧불을 쫓아다니던 아이 들도 하나 둘 잠자리로들 들어가고

마을의 여름방학은 깊어지고 아낙네 들은 멍석위에 누워서 생초(生草) 모기장도 불면증도 들어보지 못한 채 꿀 같은 단잠이 퍼붓는다.
[꿀 같은 단잠에 빠져든다.]

쑥을 더 집어넣는 사람도 없어 모깃불의 연기도 차츰 가늘어지고 보면 여기는 바다 밑처럼 고요해진다.

굴속에서 베를 짜던 마귀 할미라도 나와서 다닐 성부른 이런 밤엔 헛간 지붕 위에 핀 박꽃의 하이얀 빛이 나는 무서워진다.

한잠을 자고 난 애기는 아닌 밤중 뒷산 포곡새(布穀鳥 뻐구기) 울음소리에 선뜻해서 엄마 가슴을 파고들고 삽살개란 놈은 괜히 짖어대면 마침내 온 동리 개들이 달을 보고 싱겁게 짖어 대겠다.

마을의 여름방학은 깊어가고라고 한 것을 보면 이 글은 노천명이 10대 중후반 쯤(즉 1930년대)를 상기하면서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고향이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이지만 당시의 여름밤 풍경은 삼천리 방방곡곡이 거의 똑 같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