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쉼터에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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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사는 세상>
🍎 방정환 선생의 일화 🍎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 선생이 말했습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오?”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말아.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방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390원을 내놓았습니다.
옛날 돈 390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방 선생이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이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 XX야!”

얼마 후 날이 밝았습니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강도와 순경이 찾아왔습니다. 순경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했다고 하기에 확인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이때 방 선생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 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도 방 선생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 선생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 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방 선생에게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평생 선생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후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강도가 강도질할 때 감사하라고 한다면 감사가 나올까요? 강도는 본성 자체가 감사가 나오지 않는 존재입니다. 부족함이 감사함보다 항상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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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사는 세상>
🌳공병우 박사를 아시나요?🌳

1906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공병우(公炳禹) 박사의 삶은 ‘최초’ 라는 수식어로 가득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의사!
최초의 안과 병원 개원!
최초의 쌍꺼풀 수술!
최초로 콘택트렌즈 도입!

이같이 화려한 경력으로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

하지만 공병우 박사는 애초에 돈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어떻게 사용할까 였다.

그런 그의 삶에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눈병 치료를 받으러 왔던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우리의 한글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

이후 공병우 박사는 한글 타자기 개발을 시작한다. 병원도 그만두고 얼마나 온 정신을 기울였던지 사람들은 ‘공병우 박사가 미쳤다’ 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한 열정 덕에 공병우 박사의 한글 타자기는 미국 특허를 받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병우 박사의 도전은 멈춤이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한글 타자기도 개발해 내었다.

누구보다 한글을 아꼈던 공병우 박사는 그의 나이 82세가 되던 해에도 그 열정을 잃지 않고 한글문화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곳에서 좀 더 편리하게 한글 자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하였으며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과 정보를 나누며 프로그램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열정을 쏟은 결과 지금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문서입력 프로그램인
‘아래아 한글’ 을 만들어 내게 된다.

한글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지만, 의사로서도 본분을 잊지 않았던 그는 미국에 갔을 때 보았던 구급차를 수입해 전국을 돌며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학교도 세웠다.

그렇게 한없이 베풀고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한평생 자신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 공병우 박사의 성품은 그의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마라. 장례식도 치르지 마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시신은 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하라. 유산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위해서 써라.”

그의 유언대로 공병우 박사의 각막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었고, 시신은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기증되었다. 또한, 그의 죽음은 이틀 후에서야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1995년 89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신문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빈소도 없고, 장례식도 없고, 묘지도 없었다.

살면서 그리고 죽는 순간에도 또 죽어서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길 바랐던 공병우 박사님!

세상 모두가 그 같은 삶을 살 순 없다.

그러나 지식이 될 수도 있고,
능력이 될 수도 있고
웃음이 될 수도 있고,
경제력이 될 수도 있고

나눌 수 있다면 나누세요

인생을 충분히 잘 살다 간다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 공병우 박사 ㅡ 🔝